| ArtspaceH |

 


Heo, Yong Sung "marmottet" 展 허용성 개인전 (2011. 04. 29 ~ 05. 12)



marmottet 展 허용성 개인전
[Solo Exhibition]

2011. 04. 29 ~ 05. 12



전시소개 / INTRODUCTION

‘목적 없는 여행’을 앞둔 그대에게
- 허용성의 ‘초상’ 앞에서

한때 위기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였던 회화의 운명이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회복하리라고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미술시장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지만, 미술이라는 저 도저한 흐름이 세간의 호들갑처럼 일개 몇몇 흐름에 자신의 운명을 맡길 정도로 무력하지는 않을 터. 이는 한국화도 마찬가지여서 장르의 회복을 부르짖기보다는 회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어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작가들이 많아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한국화의 전통과 정체성을 놓고 ‘호부호형(呼父呼兄)’을 운위하는 모습도 예전에 비해 찾기 힘들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필묵으로 그려낸 사적인 경험과 그것을 통로 삼아 한국화의 현대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거나, 아예 한국화의 시야를 훌쩍 뛰어넘는 작품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수묵의 다양한 색감을 다채롭게 펼쳐내고, 농담의 변화가 없는 담묵의 번짐을 즐기거나 그 번짐 사이의 감각적 변화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작가군이 있는가 하면, 수묵에 의한 내재적 풍경을 유지하되 다른 장르에서 차용한 기법과 재료로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또 다른’ 한국화를 꿈꾸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동안 한국화가 지닌 자성(磁性)이 ‘한국화’냐 ‘동양화’냐는 서로 다른 극점을 상정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밀치는 데 맞춰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화의 다양한 실험과 변주에도 불구하고 ‘한국화의 뉴웨이브’를 응시하는 윗세대의 시선은 그리 안온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 듯 보이지만, 외풍이 불어오면 쉬이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뼈대며, 한국화의 의미가 결국 여백이라는 침묵의 미학에서 생성됨을 간과하는 듯한 태도가 못내 마뜩치 않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 지적에 일견 깐죽거림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프로페셔널’ 작가가 되어, 전시 하나 여는 것쯤, 그리고 여기저기 회자되는 것에 별반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이들로서는 젊은 작가들의 생존을 위한 발악이 징징거림으로 비칠 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의 한국화단을 일구어낸 그들의 지난 세월은 우리 시대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흔치 않은 미적 사유의 결정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젊은 작가들을 ‘매개’하는 세대로 살아가는, 그리고 그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나로선 양자 사이의 거리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데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래 우리를 찾아온 젊은 한국화(또는 회화)의 대부분은 현대인이 느끼는 공허함과 낯섦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관계의 허무, 혹은 관계의 회복. 우리가 훗날 한국화단을 의탁해야만 하는 젊은 세대들의 작업은 이처럼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을 갈망하거나, 부러 외면하는 양상으로 갈리고 있다. ‘한지에 수묵(채색)’이라는 기본적인 어법은 여전하나 인체의 특정 부위를 강하게 응축시켜 현실과 어긋나 있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거나, 일상의 사소한 경험과 소소한 사건을 자신만의 상상과 상징적 요소로 에둘러 담는 모습은 이들이 바라보는 현실의 부박함의 두께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그건 허용성의 그림도 마찬가지여서, 작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작품에 모두 끌어 담고자 한다.



또래 작가들 가운데 단연 감칠맛 나는 붓질을 선보이는 허용성은 본래 오바마 대통령 등 대상이 명확한 이들의 초상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마치 ‘이미지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철저히 묘사적인 그림은 한국화의 밀도를 유지하면서도 젊은 작가 특유의 유연성이 느껴졌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자신도, 그것을 바라보는 외부인도 감지할 수 있었듯이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우선 두루뭉술하게 분류한다면 같은 세대로 나뉘는 ‘바로 위’ 젊은 작가들이 그러한 작업으로 화단에 먼저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이며, 그들과는 또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서술하기에는 작업의 양이 미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허용성의 작업을 여전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건 그가 한국화의 내재적 특질을 고스란히 유지하되, 마치 낯선 공간에서 온 듯한 우리 시대의 초상들을 표현하는 데 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한국화의 현대성을 해석하는 또 다른 리트머스로 기능할 만한 좋은 그림과 마주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유효했고 적확했다.  


허용성의 그림은 젊은 날의 초상을 연작 형식으로 담았다. 정적이되 적지 않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그의 그림 속 초상들은 젊음이 껴안을 수밖에 없는 불안과 소외를 내포하고 있다. 일견 유명인의 초상이 세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나는 이번에 작가가 선택한 변화야말로 참신함은 물론 시기적으로 적절했다고 본다. 푸코의 생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는 그림을 그리는 ‘주체’의 문제로 기능할 터인데,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가 비로소 그림을 위한 그림이 아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어서, 시중에 나와 있는, ‘잘 그렸다’라고 평하는 그림 중 적지 않은 작품이 고도의 붓놀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소 생뚱맞은 비유일지 모르지만, 세간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예능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단지 ‘가창력’과 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몇 가지 요소만으로 좋은 가수를 ‘서열화’시키는 것과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횡행하는 모습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노릇이다. 언제부턴가 ‘좋은’ 예술을 논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일관된 ‘입장’을 너무 경시하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허용성의 그림은 전작에 비해 그 매끈함은 덜할지 모르지만 작가의 붓이 의도한 진실에 관객의 시선이 모아진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화려한 21세기 스마트 문명이 도리어 폐허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또래 세대들을 대변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짙은 어둠의 끝, 그 속에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막막함, 마치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기성세대의 상업적인 실험에 지친 동세대의 각종 징후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를 실험적인 한국화 양식을 통해 작품화시키고 있다. 작가가 스스로 ‘끼어 있다’라고 토로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자신을 비롯한 또래 세대의 피 속에 흐르는 패배주의를 담담히 그려냈다. 그림을 그리는 내가, 혹은 네가, 아니 우리가 ‘88만 원’이라는 교묘한 장치에 묶인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울분이 섞여 있는 듯 보이는데, 작가는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함의도, 저 지고지순한 아카데미가 지키려 애쓰는 학문의 전통도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라는 이 도저한 리얼리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을 조여 오는 규격화된 현실의 저 너머에 자리한 ‘판타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작품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하얗게 부유하는 듯한 그림 속 ‘초상’은 청춘의 활력이 거세된 듯 ‘무욕(無慾)’의 이미지로 관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에 있어 가장 적극적으로 현실 속에 뛰어들어야 할 시기에 오히려 자신의 반경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기생해야 하는 그들의 모습은 체념한 듯 보이지만, 그만큼 보는 이의 심경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이다. 나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작가의 그림에서 ‘자유’라는 감정의 질(質)을 맛볼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족속이 사는 동안 꾸역꾸역 욕망을 채워 넣으려 기를 쓸 때, 다른 관점으로 미술을 행(行)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의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알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는 거라고, 어차피 세상은 끝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며, 우리만큼은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자고 또래들을 다독이는 것 같다. 쉽지 않으리라. 누구나 청춘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동안에는 세계 및 자아와 한판 맞짱을 뜨고 싶은 본능을 감출 수 없는 법. 그러나 작가 허용성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체득한 건 실존의 중압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현실의 보편적인 청춘과 달리, 자신이 고독과 소외라는 삶의 조건을 심미적인 언어로 정련하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하다. 모든 것을 서바이벌로 산정하는 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 진정 ‘품위 있게’ 산다는 것은 젊음이라는 연료가 고갈될 때까지 세상과 맞서 싸우는 것도, 고고함을 쫓아 헉헉거리며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의 ‘초상’을 통해 세상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범상치 않은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옳은 말이다. 현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해서, 기약할 수 없는 시공간을 떠돈다고 해서 누군가의 자취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부단히 경주하는 것보다, 당장의 행선지가 없어 어디론가 떠도는 그 초연함이 진정한 예술로 호명되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작가를 비롯한 이 땅의 젊은 예술가들은 붓을 다루고 부리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여 예술을 향한 나의 믿음이 너무 과한 건 아닌지, 그리하여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지금의 내 모습이 어디어디를 가봐야 한다고, 무엇무엇을 가져야 한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느라 부산스럽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떠나기도 전에 제풀에 주저앉고 마는 ‘관광객’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기로 하자. 추측건대, 예술을 향한, 삶을 향한 필사적인 사랑은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공간을 점유할 수 있고, 자신만의 축소된 풍경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작가가 분류한 기성세대에 속한 내가 감히 말하고자 한다.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보라고, 가급적 멀리 가라고, 그리고 함께 가자고.


                                                                                                          윤동희 | 북노마드 대표, 광주비엔날레 <눈(noon)> 편집위원






Heo, Yong Sung  허용성  "Gallery"


White woman 90×90cm korean color on korean paper  2011



White man 100x80.5cm korean color on korean paper  2011



Blind person 117x91cm korean color on korean paper  2011



Red eyes 100x80.5cm korean color on korean paper  2011



White woman 136x91cm korean color on korean paper  2011



 
| ArtspaceH |